스물일곱 메드베데프가 서른여섯 조코비치에게 묻습니다. 푸념은 아닙니다. 열 살 가까이 차이 나는 우승자에게 보내는 존중과 경의, 그 이상을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US오픈 시상식은 패자 메드베데프가 쏟아낸 최고의 말로 장식됐습니다.
메드베데프의 푸념 같은 찬사...나에게 조코비치란?
다음 말을 더 소개해볼까요.
“이번이 우리의 세 번째 결승이었어요. 아마도 이게 마지막이 아니겠죠. 진심으로 조코비치가 몇 번 더 정상에 갈 것이라 기대해요. 언제쯤 조금 페이스가 떨어질 날이 올까요? 축하해요. 24번의 메이저대회 우승? 나 역시 경력이 나쁜 편이 아녜요. 난 ATP 투어 대회서 20번 정상에 섰어요. 조코비치는 메이저대회만 24번 제패했죠. 와우. 놀랍습니다.“
서른 넘어서 12번 우승, 이게 말이 돼?
메드베데프의 말이 진심인 이유는 조코비치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알 수 있죠. 메이저대회 24번 우승 중 절반을 서른을 넘겨서 일궜습니다. 2018년 윔블던 이래로 5년간 12번 메이저대회 정상에 섰습니다. 그 기간 19번 메이저대회에 출전해 15번 결승에 진출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잘한다...조코비치 롱런 비결은?
이 무렵이 페더러와 나달이 조금씩 전성기 커브가 꺾이던 시기라 그런 걸까요. 조코비치는 나이가 들수록 우승을 더 많이 하는 추세를 보입니다. 메드베데프가 “아직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치고 힘들 때가 왜 없을까...드러누운 조코비치
그렇다고 조코비치가 약해지는 순간이 없었을까요. 결승전 2세트, 뜻밖의 장면이 나왔죠. 게임스코어 3대3으로 팽팽하게 맞물릴 때, 조코비치는 서른개 넘는 랠리 끝에 점수를 잃고선 코트에 드러누웠습니다. 한동안 일어서지 못했죠. 누운 채로 깊은숨을 내쉬고 있는 것만으로 상대에겐 이미 지쳤다는 신호로 비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무너지나 싶었습니다.
'타이브레이크의 사나이'답게...
조코비치는 100분 넘게 이어진 2세트 내내 라켓에 몸을 기댄 채 힘들어하고, 서브를 넣은 후 스트레칭을 하며 뭔가 불편한 모습을 계속 비쳤습니다. 그런데도 그 세트를 잡았습니다. 게임스코어 6대6, 긴장의 최극단으로 몰리는 타이브레이크에서 7대5로 추격을 뿌리쳤습니다. 이게 사실상 우승으로 가는 모멘텀이었죠. 돌아보면 이런 생각마저 듭니다. 메드베데프에게 아프고 지친 것처럼 보이게끔, 역정보를 흘린 것은 아닌지….
위기에 몰렸을 때 강하게 튀어 오른다
타이브레이크에서 조코비치만큼 잘 버티고, 잘 이겨내는 선수가 있을까요. 흔들리지 않는 멘털은 자산이 된 지 오래입니다. 조코비치의 무서운 상징입니다. 위기에 몰렸을 때 강하게 살아나는 회복 탄력성이 오히려 상대를 주눅 들게 하는지 모릅니다. 타이브레이크까지 간 승부에서 조코비치가 승리하지 못한 사례를 찾기가 힘들 정도니까요.
승부 뒤편에선...딸 안으며 펑펑 우는 아빠
좀처럼 흔들리지 않은 조코비치지만 우승이 확정된 후엔 숨은 감정을 토해냈습니다. 관중석 한편에서 경기를 지켜본 가족에게 찾아갔고, 여섯 살 딸 타라를 품에 안으며 눈물을 쏟았습니다. 7월 윔블던에서 알카라스에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을 때도 눈물보가 터진 건 아빠를 응원한 아이들을 보는 순간이었습니다.
코비 브라이언트를 기억한다...뭉클한 세리머니
우승 세리머니는 3년 전 헬리콥터 사고로 세상을 떠난 농구 전설 브라이언트를 향한 추모로 대신했습니다. 브라이언트의 등 번호도 '24'였죠.
" 코비는 친한 친구였죠. 내가 부상으로 힘들어할 때 승자의 정신력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나의 멘토 중 하나였죠. 조언을 구할 때마다 항상 함께였어요. "
'24'자가 새겨진 하얀 옷, 아마도 윔블던 때 준비해 둔 우승 복장이었을 텐데 그 안에는 브라이언트와 함께 찍은 사진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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